[신앙칼럼] 이 늑대를 어찌하면 좋을꼬?
편집자
1
3,639
2012.09.10 00:28
어느 숲속에 동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도 두 마리, 말도 두 마리, 기린도 두 마리, 코끼리도 두 마리... 그런데 늑대는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친구가 있는데 늑대만 외톨이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슬픈 늑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한번은 말이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그렇지만 늑대는 말처럼 빨리 달리면서 노는 것이 힘들고 재미도 없었습니다.
토끼가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그렇지만 늑대는 몸이 너무 커서 토끼 굴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기린이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그렇지만 늑대는 키가 작아서 기린이 저 위에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코끼리가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이리 와서 우리랑 같이 놀자.”
그렇지만 늑대는 긴 코가 없어서 코끼리들과 장난치며 놀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학교 수업시간에 친구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시켰더니 한 아이가 쓴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채 수업을 마쳤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저도 궁금해 죽을 지경입니다.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에서 늑대의 이미지는 거의 동일합니다. 포악한 약탈자요 평화의 파괴자입니다. 그래서 동화의 결말은 대체로 늑대에 대한 징벌로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작가인 아이는 늑대만 친구가 없는 외톨이로 만듦으로써 늑대에 대한 징벌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늑대는 벌을 받아도 싼 문제아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중요한 테마는 늑대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외톨이인 늑대를 감싸주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늑대의 성품과 행동의 결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기존의 질서와 대조적인 새로운 질서와 시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비록 늑대가 미움의 대상이고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를 받아들이고 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용서하고 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늑대와 친구가 되려고 했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늑대를 친구로 삼는 것은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말이 늑대와 친구가 되려면 질주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고, 토끼는 굴에 들어가 소꼽장난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기린은 긴 목을 늘어뜨리는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늑대와 친구가 될 수 없고, 코끼리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기다란 코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늑대와 친구가 되는 것은 불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이기도 합니다. 늑대를 사랑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늑대의 성품이 변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의 후반부 어느 시점에서 늑대는 친구가 되어주려고 했던 토끼를 잡아먹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동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은 바로 우리 인간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어느 집단에나 늑대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늑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범죄자일 수도 있고, 형제들을 힘들게 하는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 가도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늑대가 있고, 교회에도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감정과 사유를 공유하지 못하는 늑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늑대를 싫어합니다. 늑대만 없으면 평화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늑대는 그 평화와 행복을 깨뜨리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늑대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감싸안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불편하고 희생을 요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가치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늑대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고 선한 양심의 소유자가 되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하고 불편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늑대를 친구로 삼았다가 토끼가 잡아먹히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늑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선한 결정은 그 집단에게 매우 악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차라리 조금 가슴이 아프더라도 늑대를 쫓아냈더라면, 토끼가 잡아먹히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공동체가 붕괴되는 불행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이 늑대를 어찌할꼬?"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탄식이 있습니다.
"혹시 내가 그 늑대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