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첫주 신앙칼럼 김덕경목사

편집자 0 2,865 2012.09.09 23:44
 -나의 이야기 - 나는 참으로 많은 복을 받고 태어났다. 서울에서도 한 가운데, 소위 서울 토박이들이 산다는 제동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 안에서 자랐고, 별탈 없이 대학가고, 군대 가고, 또 어렵지 않게 취직하고, 예쁜 아내 만나서 결혼하여 아들만 셋을 낳았으니 참 많은 복을 받은 셈이다. 또 장년에는 하나님의 섭리로 뉴질랜드에 이민을 와서 살면서, 늦깎이로 55세에 신학을 공부하는 행운도 누리게 되어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는 복을 받았으니 그 아니 축복이랄 수 하지 않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신학 공부도 마치기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한국인 예배를 시작하라고 성화(?)를 하지 않나. 아니, 이건 무슨 말? 날더러 목회를 하라고?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못하겠다고 요나처럼 도망 다녔지만, 메뚜기가 날아야 풀밭이 아니겠는가? 반강제(?)로 하나님의 팔에 붙들려 시작은 했는데, 목회라는 것을 소, 닭 보듯 했지, 언제 관심을 갖고 생각이나 해봤나? 그리고 뭐 신학교 나오면 다 목사가 되는 건가? 나도 모르게 교회에서는 뉴질랜드 장로교 총회에다 목사 신청을 다해놓고는, 이제부터는 별도의 목사 교육을 다시 받으란다.

 멘토가 따라붙고, 또 목사후보자 교육 담당 목사가 붙고, 이 두분 목사님들과 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나의 모든 이야기, 지금 하고 있는 교회이야기, 신앙, 믿음, 신학등에대해서 쉬지 않고 의논하고 가르침을 받고….(나중에 알았지만, 그분들은 총회에 모든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목사 시험은 이 지역 키위 목사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설교를 하고, 그분들이 내는 테마로 즉흥 설교를 하고, 또 키위 목사님들 세분이 방안에서 약 세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하고, 이 지역뿐 만이 아니라  오클랜드에서  내려오신 분들(총회에서 오신 목사님들) 앞에서 또 설교를 하고,
나중에는 웰링톤에서 정신과 박사가 타우랑가로 와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면서, 
정신 감정 테스트 및 적성 테스트를 하는 것이 마지막인가 했는데, 더니든의 녹스 칼리지(장로교 신학 대학원)에 논문을 제출해서 교수들이 합격 점수를 주어야 목사로서 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약 6천자 정도의 논문을 써서 제출했고,  
그런데 이 모든 과정, 공부부터 시작하여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사실 내 실력으로 그 모든 과정을 무사히 통과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무사히 모든 것을 마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셨으리라.

  만추의 나이에 시작한 목회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이 사람을 쓰려고 하셨을까? 젊고, 나보다 유능한 목사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나 같은 사람을 쓰시려고 하셨을까?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나 자신에 대한 의문이었다.
 남보다 잘난 것도 없고, 말하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보다 믿음이 깊은 것도 아니고(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한국에서는 주일에만 성경 책을 드는 정도였음)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하는 생각은 멈추어본 적이 없었다.

 가시고기라는 물고기가 있다고 하는데 이 물고기는 알을 돌에 낳고 나면 암컷은 자기 사명을 끝냈다고 어디론가 가버린다고 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수컷이 알을 지키는데, 알들이 부화되면 수컷은 자기 머리를 돌에 찧어서 자신을 찢어버리고 죽는다.  그러면 흐물흐물 찢어진 자기 아버지의 몸뚱어리를 어린 자식들이 먹고 쑥쑥 자란다고 한다. 이처럼 미물의 세계에서도 감동을 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누군가가 희생하였기에 다음 세대가 존재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우리보다 먼저 산 분들의 눈물의 희생의 결과이다. 이민자의 역사를 보아도 우리는 그때 그분들이 고생 속에서 개척해 놓은 길들을 우리는 뒤에 와서 그냥 즐기는 것들이 많이 있다. 
 
 가족도 부모님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희생을 입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몸 버려 피 흘려 우리의 죄 값을 치루어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큰 축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도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바로 우리의 희생이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새벽 기도는 참으로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는데, 말씀의 선포는 없이 오직 기도만 했다. 어떤 날은 몸이 피곤하여 기도하면서 졸기도 했고, 어떤 아침은 그냥 이대로 잤으면 하는 마음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집사님들이 우리 교회에 오면서 새벽 기도에 말씀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 동안 해온 내 행실에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몸을 아껴서 무엇 하려고 하나? 하는 생각과 하나님께서 나한테 하라고 하시는 게 복음의 전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물론 성령께서 주셨겠지만, 이 몸의 희생이 없이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그러나 하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복음의 선포를 새벽에 같이 병행하게 되었다.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이다. 한때는 심취하기도 했던 노자의 사상이었다. 노자의 가르침 중에서 머리에 남는 구절은 ‘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인간의 속성은 위로 향하는데 물의 속성은 아래로 향한다. 공중에 그대로 남아 있을 때에는 아름다운 모습인데, 나뭇가지에 떨어지고, 땅 위로, 개울로, 강으로 그리고 바다로 가는 물의 모습은 겸손과 희생의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무척이나 성경적인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겸손했을 때에, 아니 남을 나보다 조금만 더 생각했을 때에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밝아진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이 나라에 와서 잘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우리보다 먼저 이 나라에 이민 온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 한 것이 아니냐, 이제 교회도 이웃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주면서, 희생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사랑을 받고 오늘의 우리가 있기에 이제는 우리의 후세를 위하여 조그만 데서부터 사랑을 주면서 살아봅시다. 


   <글: 세인트앤드류스 김덕경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