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궁핍의 정신과 풍요의 노래

편집자 0 4,234 2012.09.10 23:40
어려서 학교를 다니던 때에 어머니께서는 가끔 계란을 풀어서 만든 넓고 두툼한 계란말이를 보리밥 위에 덮어서 싸 주셨다. 그 당시는 몰랐는데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고 계란말이와 밥을 함께 떠서 먹을 때 행복해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흔한 반찬이었던 염소 똥 같은 콩자반, 고추장에 버무린 단무지, 장아찌 조각, 잘해야 멸치볶음이나 구운 김을 맛볼 수 있었던 궁핍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비슷한 시절을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모자이크처럼 얼룩진 공유의 추억일 것이다.  
그때에 견주면 지금은 훨씬 풍요해졌지만 정신이나 마음의 궁핍함은 그때보다 더한듯하다. 염치 있는 수줍음과 순박함, 인정은 점점 사라지고 마음 모양새, 마음씀씀이들은 더 각박해지지는 않았는지 부끄럽게 되돌아보게 된다.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라는 등식이 진리가 아님을 알지만 일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삶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삶의 스타일이 지향하는 방향은 궁극적으로 풍요를 위한 계획, 풍요를 위한 행진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오히려 도시락의 보리밥 위에 덮였던 계란말이가 궁핍했어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무엇을 얻기 위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성취는 귀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얻은 것을 어떻게 누리며,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상에 앉아 풍요를 노래하는 것보다 정상에서 눈을 돌려 아래를 향하여 손을 펴고, 넓은 가슴으로 아래를 품을 때 누리는 풍요가 더욱 크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조금만 알아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왜 조금만 가져도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목이 곧아지면서 거만해지고, 왜 조금만 높아져도 아래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것을 풍요라고 생각할까? 아마도 궁핍의 정신이 결여된 풍요로움을 잘못 누린 결과로 인해 마음과 정신이 빈곤해진 탓이라 여겨진다.

작은 것에 대한 고마움과 행복함의 기억이 많은 사람들의 삶은 풍요롭다.
누군가 내게 주었던 작은 도움들,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통해 궁핍했던 그 당시를 잊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조차도 당연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는 것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궁핍한 때를 잊어버릴 때 열렸던 마음들조차 자꾸 닫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있다. 풍요로움이 궁핍을 잊을 정도로 덮어버리면 잘못 인식되어 굳어버린 풍요가 감사와 아름다운 기억들을 잃어버리게 할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 지금 우리는 조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낯 설은 이방의 땅에서는 정말 간단하고 단순한 일조차도 난감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힘들고 답답할 때가 있다. 그때 내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의 손길을 기억하라. 더 나아가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진 것의 풍요를 경영할 줄 아는 사람이다. 궁핍에 대한 기억과 정신은 풍요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지만 궁핍의 정신이 소멸된 풍요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궁핍에 대해 관심도 없고,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누리는 풍요가 전부인 줄 알고 산다. 기억하라. 풍요 중에 찾아오는 무력감과 삶의 회의는 궁핍에 대한 기억과 정신을 상실한 데서 온다는 것을 …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동안은 궁핍으로 인한 신음소리를 멈추고 풍요를 꿈꿔야 하며,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영육간의 삶이 풍요로워졌을 때에는 궁핍했던 때의 신음소리를 기억하면서 풍요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궁핍의 정신은 풍요로움 속에서 내 영혼과 삶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와 같은 것이며, 내 삶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타우랑가 한인 장로교회 김기오 목사>
  www.taurangachur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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