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시인유영호 0 2,744 2016.07.08 00:19
여승(女僧)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어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을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저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에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군더더기
얼마전, 머룻잎 이슬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시인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래전 작은 문학 모임의 말석에 앉아서
송수권시인이 따라주던 술과 그의 문학세계를 안주로 받아먹던 기억이 납니다.
시인이 꿈꿨던 세상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김난영/수덕사의 여승
https://www.youtube.com/watch?v=CRTvV1c2I9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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