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방랑시인 0 2,783 2016.06.28 23:55
습작
 
         박지웅
 
오래도록 첫 줄을 쓰지 못했다
첫 줄을 쓰지 못해 날려버린 시들이
말하자면, 사월 철쭉만큼 흔하다
뒷줄을 불러들이지 못한
못난 첫 줄이 숱하다
도무지 속궁합이 맞지 않아
실랑이하다 등 돌린 구절도 허다하다
한 두어 철 기다리고 꿈틀거리다
첫 줄은 십일월에 떠난다
문득 하늘가에 흐르는 낮은 물결
소리, 고개 들면
기러기처럼 날아가는 아득한 첫 줄
잡으려니 구부러지는 첫 줄
읽으려니 속을 비우는 첫 줄
하늘가 통째로 밀고 가는
저 육중한 산 하나
오래도록 그 첫 줄을 잊지 못했다
 
# 군더더기
시인 폴 발레리는  “시의 첫 행은 神이 써주고
그 다음 두번 째 행부터는 시인 스스로가 쓴다”는 말을 남겼었죠.
시인에게 첫 행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작업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천재 시인들도 더러 있지만
그 능력마저도 神이 내린 것이니 어쩌겠습니까?
저같은 얼치기야 언감생심이지요.
그래도 시는 무수한 습작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저 육중한 산 하나 가볍게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습작인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김동률/기억의 습작
https://www.youtube.com/watch?v=EtXJHwX3ryU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