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詩

방랑시인 0 2,651 2016.05.13 00:31
출가
 
    한용국
 
1.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시고
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선인장 화분의 가시들이 날카롭게
형광등 아래에서 빛날 때마다
조금씩 일렁이며 엎질러지는
물 속의 집
 
2. 거리마다 나무들은
마르고 빈 가지들을 허공에 흔들었지만
어디서도 이파리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밤마다 벽에 봄을 낙서하고
아침이면 강으로 가
얼음 속의 돌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3.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출가하려므나, 어머니
저는 출가한 지 이미 오래인걸요
폭설 속에서 무엇을 계속 쓸고 계시는지
저도 그래야 할까요
한 걸음 걷고 나면 돌아서서
깨끗이 비질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4. 십 년 만의 귀가, 십 년 내내
면벽 중이신 어머니, 등에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하염없이 물 속으로 잔뿌리는 밀어 내리는
양파의 가계(家系), 나는
가부좌를 틀고 종달새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고단한 가족사, 그 안에서 자라온 화자.
그리고 어머니의 종교가 갖는 의미.
흑백영화를 보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네 편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출가란 세속의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 유약한 화자의 출가란
'나는 가부좌를 틀고 종달새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의
결미가 강렬하게 말해주듯,
결국 미쳐져 가는 정신의 출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 텃새인 종달새가 지저귀는 이유는
암컷을 부르기 위해서보다는
텃세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랍니다.
문득 슬프게도, 이 시에서 화자의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송춘희/수덕사의 여승
https://www.youtube.com/watch?v=nyBkDfpw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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